2006/02 9

재기를 위하여!

슬럼프랍시고 한 두어달 찌그러져 지내다 맘껏 게을려진 심신에 재기를 위한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이사를 고려중입니다. 어제는 서울에서 한참 먼 황량한 곳에 있는 (그 덕분에) 심히 넓고 우아한 아파트를 보고 한 이년 짱박혀 있어보려는 궁리에 들떠 있다가, 잠시 스스로를 유배시켜보려는 이 야심찬 계획에 가까운 이들이 심한 우려를 표하는 바람에 마음을 거두었고, 오늘은 호수가 보이는 곳을 다녀왔더랬습니다. 조만간 날 보시려거든 호수가 보이는 곳으로 오세요, 라고 말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하거나 조만간 나의 일상을 새롭게 세팅해 보려합니다. 그 생각으로 한동안 잔뜩 느슨하게 풀어져있던 뇌의 주름들이 조금씩 꼬물락 꼬물락하면서 간격을 좁히고 있는 듯 합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마음을 많이 주어야겠습..

lounge 2006.02.27

새, 김종철

새 김종철 아무도 산 채로 세상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하늘로 높이 날면서 세상을 듭니다 새들에게는 지옥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십자가는 왜 당신이어야 합니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십자가가 하나씩 있다. 새들에게 지옥이 없는 까닭은 자기만의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무거우면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지금 당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가장 가벼운 십자가다.- 황지우 때로 시인이나 소설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글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위안을 얻거나 치유도 받곤 하면서 (때론 복수도 ^^), 그것을 또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이들이 그들이니까요. 대체로 삶의 고통을 가장 가치있게 보상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 아닐까, 란 ..

lounge 2006.02.25

별을 보다

친구를 꼬드겨 별을 보러 갔었습니다. 때로 심장을 조여오는 아픔을 남기고 달아다버리는 자잘한 삶의 시간들을 떠나 수천 만년 영원의 시간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달이 휘엉청 밝은 날. 이름만 익숙한 별자리들의 모습을 확인해보고, 망원경을 통해 손톱만한 토성의 띠와, 보름달의 형상을 한 달, 그 속의 토끼의 모습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빈약한 렌즈로는 총총한 별들을 담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간신히 달을 찍고 들어와 가지고간 노트북으로 영화 "콘택트"를 보았습니다. 저 수천광년 빛나는 존재들에 비하면 찰나에 지나지 않을 유한한 시간을 살며 상실의 고통을 감내해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한마디 위로 같은 이 영화를, 해마를 떠나보낸 hotpaper님께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해마의 안식을 기원하..

lounge 2006.02.23

고맙다, 해마야.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 이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게 처음입니다. 강아지 해마가 '갔기' 때문입니다. 20일 가까이 하던 생리현상이 멈췄나 싶어 목욕시키기 전에 산책이나 다녀오자고 한 것이 잘못이었지요. 녀석은 통조림에 비벼준 제 밥을 맛나게 해치우고는 줄이 팽팽해지도록 제가 먼저 앞으로 나서며 나를 끌었습니다. 오랫동안 집에 갇혀 있었으니 코에 바람을 넣는 게 신났겠지요. 녀석은 마지막 추억으로 떡볶이 집 앞에 똥도 떡 하니 여섯 방울이나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갔습니다. 멍청한 주인이 아주 짧은 시간 한눈 파는 사이에. 식구로 지내던 강아지가 숨을 멈췄는데 처음에는 그게 현실감이 없습니다. 녀석을 안고 한동안 멍하게 서서 차가 달리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눈물이 앞을 가려 움직..

lounge 2006.02.23

Book Faking

출처 : 예스칼럼, 스노우캣의 책이야기 예리한 시선이다. 그다지 많이 보지도 않으면서 읽을 책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언제나 책한권쯤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나 역시 Fake 의 기능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스노우캣의 "불필요한 신경을 끄게 하는 기능"이 보다 적확한 표현이라고 본다. 불필요한 신경을 끄고 책 안의 세계에 숨는 것. 독서일기를 많이도 써낸 소설가 장정일이 어디선가 자신이 그토록 많은 책을 읽게 된 건 아버지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증오하던 아버지를 가리기 위해, 아버지의 존재를 잊기 위해(정확한 표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책을 들었다는 것. 책이란... 참으로 유용한 것이다. 이사갈 때를 빼곤... 그나저나 책이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외국처럼 페이퍼북이 따로 나오든지.. 종이를 좋..

lounge 2006.02.09

끝을 생각하다

땅끝 마을에 가 본 적이 있다. 땅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였을까. 그 때 기억은 희한하게도 꿈결처럼 아스라하다. 지독하게 더운 날씨였다. 강렬한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야트막한 해안의 음식점들은 영화 가위손에 나오는 집들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키보드에 푹 빠져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디오나 자동차나 그런 것들이 아니고 키보드인 것은, 넉넉치 못한 살림에서 끝까지 가볼 수 있는 것이어서,라고 했다. 나는 그를 잘 모르고 키보드의 매력도 전혀 모르지만, 그것이 세속적으로 그를 윤택하게 해주거나 인정받지도 못하는 종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을 갈구하는 열정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끝. 그러니까 끝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을 것이다. 이문재 시인의 싯귀절처럼 "후욱 비린내나는 ..

lounge 2006.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