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nge

오래된 여행 가방

kalos250 2004. 6. 29. 20:07
오래된 여행 가방       김수영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 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남보다 삶의 진도가 많이 느린 나는,
서른 살이 될 무렵의 꿈이 주머니가 많이 달린 멋진 카메라가방과
몽블랑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그러나 쉽지 않은 댓가를 치르고)
작년 이맘때쯤 몽블랑 만년필을 손에 넣었는데
뭘 잃어버리기 잘하는 나는 차마 그것을 마구 굴리지 못하고
상자안에 고이 모셔 두고 있다.

그리고 그토록 욕망하던 멋진 카메라가방은 손에 넣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만족하며 많은 길을 함께 했던 허술한 나의 카메라가방은
방구석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며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오디오 A/S를 받았다. 고장원인은 겨울내 틀었던 가습기와,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몸건강에 예민해진 탓, 공짜 파일로 음악을 듣는게 생활화된 탓에 고장이 난 것이다.
먼지 덮인 시디 파일을 꺼내 잘 닦아 트레이에 걸어놓았다.
오랫만에 듣는 "Beyond the Sky" 에 마음이 쟌해진다.
이 둥둥 울리는 매혹적인 베이스음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속에 비어있는 허공이 있음을 발견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가슴 또한 둥, 둥, 함께 공명하는...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이라고, 나와 비슷한 연배의 시인이 말한다.
잊어가는 것, 놓아버리는 것들이 많아져 한층 편안해지고 가벼워짐을 느끼던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가슴 속 어딘가를 잔뜩 메우고 있던 욕망이나 사랑이나 기억 따위들, 절실한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 한층 가벼워진 후에도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지...

PS. 일이 하기 싫어져 유선방송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오래 전에 티비에서 방영했던 드라마의 한장면을 보았다. 거짓말이라는 제목을 가진.
신혼부부가 여행길에 만난 할아버지로부터 받아 가지고 온 허브는 곧 죽어버린다.
사랑이 무료해질 때 따먹으라는 말을 들은 여자가, 사랑이 무료해지는 일이 생길까봐 물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말한다.
"그런 것들을 다 기억하면서 어떻게 나를 떠날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려던 남자는 결국 그녀를 떠나지 못한다.
기억의 무게가 그를 잡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