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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고 고마워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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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고 고마워서

kalos250 2005. 4. 20. 20:06
아픈 모양이네요.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늘 읽기만 하고 가는데, 그게 고맙고 미안하여
여기 읽을거리 하나 남깁니다.
건강 신경쓰세요.^^
-------


--동물원에 가면 아무튼 즐겁다


동물원에 가면 아무튼 즐겁다. 날씨가 궂거나 마음이 가라앉아 있어도
동물원에는 즐거워야 할 심상이 언제나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어린 동심의 끄트머리에서 되살아나는, 야생의 본능만을 남긴
텅 빈 무념(無念)에 도달할 수 있다.
길들여진 과거의 나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이란 항상 즐겁다.
  
나는 이제껏 네 번 갔는데 갈 때마다 즐거웠고 그때마다 즐거움은
달라진 모양으로 나타났다. 돌이켜보면 내가 동물원을 찾은 때는
각각 내 인생의 굽이였으니 긴 세월의 문양을 거기 새겨둔 셈이다.

어린 시절 수학여행 때 난생 처음 찾은 동물원은 내게
놀랍고 신기한 곳이었다. 그때 맹수·맹금 들을 구경하느라 빠진 몰아상태는
훗날 첫키스 때의 황홀한 찰나에 버금할 정도로 깊고 강렬했다.
하긴 텔레비전을 찾아보기 힘들던 시절이니 처음 보는 야생 동물에 홀려
대열을 놓친 녀석이 어찌 나뿐이었으랴. 나는 가방에 들어 있던 삶은 달걀이나
미지근해진 사이다 생각조차 잊고 있었다.

그 경이감 이후 한동안 내 꿈에는 호랑이 따위가 자주 출몰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멀찌감치 달아나려다 소스라치며 깨곤 했다.
하지만 무릇 모든 종류의 경험이 그렇듯 동물원이 주는 경이로움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한다. 어린 시절만큼의 강렬함은 이후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자라면서 잠시 뇌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동물원을 찾은 것은 삼십대 초반, 늦게 시작한 연애가 무르익던 때였다.
때가 때이니만치 내 눈에 그녀만이 가득했지만 여전히 동물원은
밀림이나 창공을 꿈꾸는 동물 앞에 한껏 즐거움을 펼쳐놓고 있었다.
다만, 나는 없고 신기한 동물들만 존재하던 예전과 달리 코끼리도 호랑이도
그녀의 웃음 꼬리에 매달려 나른한 몸을 뒤척였다는 것이 바뀌어진 풍경이랄까.
이때 동물원은 내 즐거움의 테두리에서 병풍처럼 둘러진 채 다소곳했다.

그러다가, 세월에 내장된 실패의 기회가 송곳처럼 튀어나와 상처를 입히던
삼십대 막바지에 나는 또 한번 동물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나 혼자였고,
내 마음은 격정에서 벗어나 허허로운 들판을 걷는 상태였다.
놀랍고 신기하던 호랑이는 그윽한 눈으로 되레 나를 구경하면서
그녀의 웃음 없이도 몸을 잘도 뒤척였다. 그때 나는 호랑이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그 나이에 세상은 의욕이나 의지로만 뚫을 수 없는 완강한 철망 구조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놀란 듯
몸을 뒤척이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자성과 함께, 그 호랑이는 아무 말 없이도
짐짓 밀쳐둔 자유와 행동의 책임을 흔들어 일깨웠다.
동물원은 상처난 내 세월을 토닥여 호수의 물결로 잔잔하게 만들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튀어나왔던 송곳은 세월 주머니에서 꺼내지고 그 상처는 아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삶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가 세월의 무게로 찾아왔다.
그 무렵에 우연히 발견하여 찾아간 동물원은 새삼스레 내게 즐거운 위로였다.
인파를 헤치며 들른 동물원에서 나는 먼저 호랑이를 찾았다.
그 눈은 어린 시절의 그놈처럼 다시 빛났고, 그 철망은 아직도 완강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철망이야말로 호랑이의 야생 본능을 반증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철망은 갇힌 호랑이의 아이디였다.

짐짓, 나는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도저히 자유로웠다.
내 삶에는 오랜 세월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침엽수 숲을 질주하는
야생의 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며칠 전, 비 온 뒤의 휴일이 화창해서 제 스스로 버젓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강아지 시추를 앞세워 산책을 나섰다. 하늘이 맑고 바람이 상쾌했다.
나서긴 했으나 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인적 드문 고즈넉한 오솔길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오늘날 자연은 인공의 승낙으로만 존재하니
하늘이나 바람이나 본래의 자연 상태가 아니어서 섭섭할 따름이다.
섭섭함 끝에 문득 가까이 있는 동물원을 떠올렸다.

사실은 차로 조금만 가면 되는 거리에 동물원이 있다. 자주 오가는 길에 있어도
일부러 들를 틈이 없어 한번도 찾지 못하고 지나치는 거기에
내 인생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동물원은 휴대전화기에 매달린
앙증맞은 마시마로 같아서 잡아당기면 내 인생의 몸체가 끌려나올 수 있다.
어쩌면 내가 다시 꿈을 꾸어야 하는 때에 또 동물원에 가
그동안 새겨둔 문양을 새로 고쳐놓을지 모를 일이다.
거기에서 호랑이는 야생의 표상으로서 내 마음에 늘 살아 있다.
철망에 갇혀 있으나 자유 질주를 꿈꾸고 몸을 뒤척이는 녀석을 상상하노라면
이 완강한 세상은 여전히 내 아이디가 아닐까보냐.

그렇다. 동물원은 꿈과 희망과 즐거움을 선물하는 공간이다.
거기에 철학과 자성의 기회를 덤으로 얹어준다.
화창한 날 애인 손을 잡고 동물원에 가자.
가면, 자신을 가두고 있는 아이디가 무엇인지 한번쯤 즐겁게 자문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