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5년 전에 미술대학을 졸업할 때 나는 그림을 한 트럭 싣고 학교를 나왔다. 그 후로 얼마나 많은 전·월세 작업실을 전전했는지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는데, 그러는 동안 그 많던 그림은 다 상하고 망가져 버려지고 지금은 그닥 크지 않은 그림 몇점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이제는 크고 두터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 자체에 공포를 가지는 소심한 그림쟁이가 되어버렸다. 평균 1∼2년마다 한번씩 이사를 해야 했던 셋방살이 인생은 무엇보다도 이삿짐이 간편해야 하는데, 트럭 가득히 캔버스를 싣고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할 형편에 대작을 꿈꾸는 화가란 역시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결국 물량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미술보다 질량이 없는 음악을 더 가까이 하게 되었다. 통기타를 가지고 이사를 다니는 풍경은 한결 자연스럽다. 어쩐지 ‘집시의 시간’ 같다.
....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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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 방송에서, <시인과 촌장>의 고양이를 신청해서 듣고 있다가 어린 날의 나를 잔뜩 매혹시켰던 이 엘피 쟈켓이 생각났다.
그러자 조그만 단칸 월세방을 전전하면서 끌고 다니는 것이 부담스러워 떠나보내야했던 꽤 많은 엘피판들이 그리웁게 떠올랐다.
한 장 한 장 어렵게 내 손에 들어왔으나 만만치 않았던 무게와 공간 때문에 처분되었던 그들은 대부분 이젠 다시 볼 수조차 없다.
그리고 이젠 공간과 무게를 차지하지 않는 MP3를 가지고 음악을 듣는다.
(물론 하드 공간은 꽤 차지하기 때문에 얼마 전에 욕심을 내어 DVD RW를 장만했다.)
친구에게 이 그림 잘 그리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무규칙이종예술가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사연을얘기해줬더니 "질량을 가지지 않는 웹상에 홈페이지를 만드는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고 말해준다. 물론 나역시 그러하다.
이 예술가의 말대로 "우리에겐 무엇인가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집시의 시간이 오래도록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을 살면서 정착을, "Culture" 을 꿈꾼다. (로또가 되면 젤 먼저 집을 사야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