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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 것, 아프다는 것

kalos250 2003. 12. 26. 17:20
'아플 때를 대비해서라도 결혼하라'고 한 왕언니는 말했다. 아무리 못된 남편이라도, 본인이 직접 간병을 하지 않더라도 가족들을 '동원'하기라도 한다고.
비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이즈음 나도 어쩔 수 없이 비혼여성들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는 각종 부인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이는 것이 사실이다. 때때로 심장이 덜컥거린다. 그래도 다시 애써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다' 걸리는 게 그 병이라고...

그런데 어느 날 보게 된 아래 글을 보고는 또 몹시 심난했다. 정말 아플 때를 대비해서라도 결혼해야 하는 건 아닌가. 물론 한번의 결혼실패 경험이 있는 선배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가설이지만 실은 앞뒤가 바뀐 명제라고, 단지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결혼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순간에 뒤통수를 때려댈 것이라고 했다.

다시, 그닥 나쁘지 않았던 내 운수에 기대본다. 결정적인 한방을 먹게 되더라도 그래, 이제껏 그닥 나쁘지 않았으니 담담히 받아들여야지...

병이란 놈이 인생의 깊이를 얼마나 깊게 하는지 역설하던 한 선생님에게 몹시도 건강한 한 후배의 건강함의 전모를 밝혔더니, "니, 무좀도 없나..."하신다.  

이곳 쥔장에게 때론 축복일 수 있는 고통에 대해서 별 거리낌없이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쭉.... 부디 더는 아프지 마소............

피자매연대(실은대안생리대운동연대)=>피같은 자매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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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는 어디 있어요?"
"보호자가 필요해요?  담당의사님이 그런 말씀 안해주셨는데"
"아니 수술을 하는데 보호자가 없어요?"
"저는 혼자 살아요. 제가 환자이자 보호자예요."
"안됩니다. 수술 시각을 연장할 터이니 주변의 친구분이라도 연락을 하세요."

여고 1년 때 맹장수술을 할 때는 부모님이 보호자였고 옆에 계셨다.
공장 다니다가 급성 신장염으로 병원에 실려갈 때는 친구들이 옆에 있었고 나중에 부모님들이 소식을 접하고 오셨다.몇년만에 딸년을 병원에서 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호자였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갔을 때 보호자를 부르라는 말에 남자친구를 불렀으나 4일만에 나타나는 바람에, 병원 근처 사무실에 있었던 선배가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중국에 있을 때 결석 통증으로 이 병원 저병원 다닐 때 북경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선배가 보호자가 되었고 결국 대한항공편으로 실려 한국으로 왔을 때 여동생과 오빠, 형제들이 보호자가 되었다.

26세 이후로 나는 부모님을 보호자로 세우지도 않았고, 물론 알리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가 40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부모님을 보호자로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용인되지 않는다. 부모님을 보살펴야 할 나이에 부모가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산다는 것은 자신이 곧 보호자가 되는 것이다.

반평생 병원신세도 꽤 진 편인데 그 전에는 주위의 친구들이 늘 옆에 있었다.
매일매일 병실에는 친구들로 가득찼다.
이번 경우는 달랐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외에는 알리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에게는 합병증으로 인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당연히 알려야 했다.
예정된 병원신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도 어느 병원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수술이 임박하면서 병문안 온다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구차해졌다.

어차피 아픔은 혼자 견딜 일이었고 간호야 간호사가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혼자 살아가는 법에 이미 익숙하다고 애써 여겼다.

수술 시각에 없더라도 수술이후 보살펴 줄 보호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수술 시간 중에라도 올 수 있는 사람에게 빨리 연락을 취하라는 단호한 태도에 굳이 버팅길 이유가 없어 친구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오라고 전화를 하였다.

구차하고 슬퍼졌다.

온다는 시각을 알려주고 수술 준비를 하였다. 이미 필요한 것은 며칠 전에 해둔터라 혈액검사,소변검사 그리고 관장을 하였다. 수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술대 위에서 나의 몸은 완전히 발가벗겨졌고 손과 발이 묶이었다.
옅은 파아란 수술전등들만이 내 시야를 채웠다.
정육점의 뉘여 있는 배 갈려진 돼지가 순간 스치었다.

" 정말 무통 주사 안맞을 꺼예요?"
"예. 어차피 진통제등 다 놓아줄 것 아니예요?"
"그렇지만 무통주사가 있어야 덜 할터인데..."
무통주사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요즘 병원에서는 무통주사를 환자가 선택하게끔 하여 돈을 번다. 똑같은 수술이라도 수술비가 다른 것은 이러저러한 의료품 장사때문이다. 입원비는 더욱 그러하다. 특실부터 집단실까지 입원비는 천차만별이다.
이미 자본주의 의료체계야 아주 좋은 돈벌이가 아니던가?

어차피 없는 놈은 병원에서도 있는 넘보다 더  아파야 한다.

" 내 친구 한놈은 다리 살에 유리가 박히고 살이 찢어져 유리파편을 빼어내고 20바늘을 꿰메야 했는데...돈이 없어서 마취를 안하고 했다고 하더라구. "

주사바늘들이 살안으로 들어오고 가슴에는 심전도 측정기가 얹혀지고 배에는 뭔가 발려진다.
6-7명의 간호사들이 내 주위에서 움직인다.
가슴에는 뭔가 덮혀지고 머리에도 뭔가가 씌워진다.  
"보호자가 아직 안오셨어요. 보호자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헨드폰에 입력되어 있어서 전화번호를 몰라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는 단 하나, 내 헨드폰 전화번호이다.
내 집 전화번호도 기억을 못한다. 내 집에 내가 전화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헨드폰을 사용하면서 전화번호를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을 뿐더러 적어놓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곧이어 담당의사가 들어왔다.
한 간호사가 " 이분 보호자가 아직 안왔는데요"
의사는 내 얼굴 위에서 " 혼자인데...뭘. 견딜 수 있지요?"
"예"
" 자 그럼 준비해"
마취가 시작된다. 숨을 크게 쉬란다.
곧이어 입과 코에 그리고 모처에 호스가 들어간다.
수술 전등들이 희미해진다.
손끝 움직임 하나, 미미한 저항도 없이 어디론가 깊이 빠져든다.

"숨을 내 쉬세요."
내 뺨을 이리저리 때린다.
얼마나 흘렀을까 멀리서 들리는 소리 그리고 통증
코에는 산소호스가 입에는 뭔가가 끼워져 있고 간호사들이 내 의식을 깨우려 한다.
통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신음소리가 되돌아 온다.

4대 통증인지 2대 통증 중 하나라는 결석 통증으로 신음할 때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병원에 실려가 진통제에 의존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 간 병원에서 하루 3번 이상의 진통제 주사는 안된다고 하여 통증에 그대로 하루를 방치하고 나중에는 일반 병원에서 사용금지된 전쟁터에서나 맞는다는 몰핀을 맞아대고 더이상 몰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세차례의 전기충격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전기충격으로 통증을 잊게하는 기가 막힌 방식까지도 동원이 되었던 것이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쳤던 그 때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해 괴로워하는 동료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죽이는 심정, 죽임을 당하는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때 그 기억이 있었지만 그 기억만큼이나 현재의 아픔은 언제나
똑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인가보다.
"무통주사를 맞지 않아서 더 아픈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간호사는 그렇게 말한다.
"무통 주사 놓아주세요."라고 말을 더듬거렸던 기억이 난다.

"보호자가 바깥에 와 있네요"
통증에 신음하는 나에게 안심을 시키려고 하는듯 몇번씩 반복해서 말을 하며
연실 나의 손을 보듬어주고 잡아준다.
간호사들이 나의 손을 잡아주고 보듬어 준다.
바로 이것이 육체적 아픔과 함께 동반되는 '무엇인가`를 덜어주려는 행위였던 것이다.

결석 통증으로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쳤던 며칠을 친구들과 선배는 나의 옆을 지키며 보듬어주고 잡아주고 안아주었던 기억들.

입원실로 옮겨지면서 보호자가 된 친구가 손을 잡아주고 보듬어 주었고
신음으로 지내던 이틀 밤낮을 꼬박 옆에서 지켜주었다.

심리적 위안감을 주는 것.
그래서 보호자가 필요했던 거였다.
통증이야 내가 견딜 일이었지만 서럽지는 않았던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들은 바로 이런 행위에 평안함을 가지게 된다.


병문안을 오려고 했던 사람들.
연락이 되지 않자 이곳저곳 병원을 수소문해서 알아내어 내어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온 일하면서 가까워진 동료가 사람들이 며칠동안 이리저리 찾고 그랬다고 하면서 병문안 가겠다는 말에 바쁜데 구차하게 뭐하러 오냐고 했고 "우리 두 사람도 안돼요?"라고 했던 그 부부는 어쩌면 서운했을 지도 모른다.
아픔을 진심으로 같이 나누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혼자 사는 이들에게 가장 '서러울 때`는 아플 때이다.
외로운 것이 아니라 서러운 것.
그래서 그 외로움은 견디면서 살아갈 수 있지만
서러운 것은 삭이면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을 돌아다니며 몸에 좋다는 야생약초를 캐어다 준 친구들
일주일 먹거리를 잔뜩 사다놓고 간 친구
내 살아가는 방식에 집요한 '간섭`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선배
일요일 온종일 장인집에서 열심히 노가다하여 마누라로부터 밑반찬을 만들게 하고 아침 출근 길 먼 거리를 달려온 후배.
정작 병원에 있을 때는 못오게 했다고 툴툴거리던 사람들이 집으로 병문안을 온다.
내 몸이 평안해지니 그들을 맞대하기가 즐겁다.  

잔인하다는 5월
2003년의 5월 한 달은 그렇게 지나갔고
6월, 물위의 뗏목같은 몸으로 시작되었다.

                                              
                                                   평온한 하루를 지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