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Shall we dance?] 2001. 03. 13

kalos250 2002. 10. 22. 01:38
몇 년 전 가끔 만나던 친구가 있었다.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삶에서의 일탈이니 탈주니 하는 말들을 구호처럼 되풀이하면서, 꿈꾸지 않는 소시민 직장인들의 나태함을 혐오하던 그가 야박하게 느껴져 괜히 성실한 직장인을 극구 변호하던 나는 분명 그를 질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뭐 누군 그러고 싶지 않아서 갑갑하게 사나, 하면서….

이름만 듣던 홍대 앞 락까페들-뭐 발전소니 언더그라운드니 하는-로 집요하게 이끌려 하던 것에 완강히 거부하던 내가 꽤나 한심하게 보였는지, “넌 그래서 안돼. 자신을 얽어매는 것으로부터 좀 자유로워지라구.” 하며 꽤 강도 높은 비난을 하던 그에게 사실 변명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단지, 안해본 거라 낯설어서 그렇지 뭐, 라는 말밖에.

영화를 봤다. 그리고 비디오를 봤다. 뒤늦게 시작한 직장생활이 만만치가 않은데다, 또 나름대로 잘 적응하고 싶은 욕심에 정신없이 지내다, 나름대로는 그에 대한 반항이라도 하는 요량이었다. 사실 영화보기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가장 손쉽고 기회비용이 적은 데다 위험요소도 없는 “안전한 일탈”이었으므로. 안전하게 일상과 전혀 다른 다른 삶을 체험하고 꿈꾸는 일이므로.

며칠 사이에 내가 본 영화는, “글루미 선데이”, “빌리 엘리어트”, “셀위댄스” 다. 오랜만에 별 기대없이 본 탓인진 몰라도 세 편 모두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글루미 선데이"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듣고, 주제곡도 한참을 들은 후에 본 것인데, 작년에 유일하게 이 땅을 벗어나  보았던 낯선 이국땅 부다페스트에서 매혹되었던 그 모든 것들이 영화 한 편에 강하게 녹아 들어 있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도 그랬거니와, 굵직한 시대적 배경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존엄의 불가해성-죽음으로까지 지켜야하는-의 호소는, 수백명의 청년들을 자살충동으로 몰아넣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 한 편에, 감성적 호소를 넘어선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이모선배는 "그런 걸 보고 퇴폐주의”라고 하는 거지”라고 말했지만) 그리고 어제 본 “빌리 엘리어트”는, 열한 살 소년이 탄광의 어두운 현실에서 팔짝 팔짝 뛰어 날아오르는 영화다. 탄광촌의 피폐된 현실과, 파업을 둘러싼 가족간의 갈등 속에서 발레라는 춤의 쟝르는 퍽이나 이질적인 거였지만, 그 속에서 이끌어내는 화해의 감동과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희망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참으로 찡한 거였다.
이질적인 것으로 말하자면 기업의 부장이었던 성실한 가장과 사교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젠가 아줌마가 된 친구가 그런 말을 했었다. TV에서 볼륨댄스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였단다. 그냥 흔히 말하는 아줌마들이 춤을 추자마자 여왕처럼 보이더라는 것이다. 사내 독후감 대회에서 3등을 했다는 김모 선배는 그걸 일컬어, “아름답고 건강한 일탈과 안전한 복귀”라고 했다던데. 아무튼 모처럼 보고 참 기분 좋아진 영화였다. 몸으로 느끼는 춤에 순수하게 빠져들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인지, 거기 나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던지, 혼자 비디오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가 피식피식 절로 나왔다.

"자연의 중력을 이기려하지 않고 그 흐름에  온 몸을 맡겨, 우주와의 합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춤은, 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내게는 여전히 동경의 대상일 뿐이지만, 봄이어서인지 자꾸만 무겁게 가라앉는 몸이 버거운 요즈음엔, “춤바람”은 타지 못하더라도 흐드러진 춤판을 구경하는 일쯤은 한 번 해보고 싶어진다.

*
2001년이라.. 그 이후로 흐드러진 것이든, 어떤 것이건 간에 춤판을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춤을 춰본 일도 없다.) 참 지난 번에 지선이가 표를 주겠다고 했던, "빨간 백조"나 보러 갈 걸...   하얀 백조에 가리워져 주목받지 못했던 빨간백조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그 춤은 어떤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