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s

[한 뼘 모자란 하늘의 질서] - 화순 운주사를 찾아서

kalos250 2002. 11. 27. 00:06





인디언 달력에 의하면, 11월은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만물을 거둬들이는 달, 작은 곰의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다. 그 아름다운 말들 속에서,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지 아니하고 대지의 품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렸던 그네들의 삶을 본다.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말에는, 확실히 따뜻하게 건네는 위로가 들어있다.

서로 좋은 풍경이 되어주기로 약속한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에 갔던 길에, 오래 전부터 벼르던 운주사를 찾았다. 그리 서두름 없이 달리던 군내 버스가 예정시간을 넘어 화순의 운주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야트막한 산능선 위에 걸려 있었다. '코스모스 하늘하늘 피어 있는 길'을 걸어, 황혼빛으로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우뚝 솟아 있는 탑들을 망연히 바라보다, 일정을 변경해 민박집을 찾았다.

운주사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1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중장터. 예전에 는 근처에 사찰과 암자가 많아 스님(중)들이 필요한 일상 물품들을 사가는 장이 자연스레 생겼던 탓에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충동적인 여행길이라 준비하지 못한 칫솔이며 식수를 사러 버스 종점앞 슈퍼에 나갔다가 만난 운전사 아저씨는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사연들을 풀어놓으시고... 어느 인생을 들여다봐도 그 속에 씨줄날줄로 얽혀 있는 삶의 애환을 생각하며 길을 나서는데, 머리 위 하늘에 쏟아질 듯한 별들이 있다.
운주사 탑의 배치는 밤하늘의 일등성별을 연결한 천체도와 닮아있다고 한다. 이렇게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이 하늘의 질서를 땅 위에 옮겨놓으려고 하였다니, 옛 선조들은 참으로  대단한 이상주의자였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이상이란 것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이튿날 상쾌해진 몸과 마음으로 운주사를 다시 찾았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드러난 돌탑과 돌부처들, 그리고 언덕 위의 와불...
운주사는 미완의 천불천탑과 도선국사의 창건설화로 유명한 곳이다. 일주야(日晝夜)에 천불천탑을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데, 마지막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 할 때,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완의 형상들이 남기는 그 여백, 안타까움, 기다림, 그리고 희망은, 미완의 존재로서 미완의 세상을 살면서 완성을 향해 꿈을 꾸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했다.
파라다이스는 없다고 했다. 모든 희망을 이룬 곳에서 변화는 없을 것이고, 변화가 없이는 더 이상 낙원일 수 없다고. 그렇다면 파라다이스로 가는 미완의 과정만이 있는 것이다.

운주사의 돌부처와 돌탑들이 갖는 특이성은 무엇보다 못생겼다는 것이고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운주사 넓은 터뿐만 아니라 언덕 고개마다에서 복병처럼 숨어있다 나타나는 돌탑과 불상들은 인생 구비구비에서의 친근하고 정겨운 사람들과의 만남 그것이었다. 그렇게 언덕길을 조금 오른 곳에서 칠성바위를 발견했다. 인간의 운명과 행불행을 주관한다고 믿었던 북두칠성을, 그 밝기까지 돌의 크기로 형상화하여 그대로 산허리에 옮겨 놓은 것이다.  
오래 전 이곳에 있었던 땀과 열정과 염원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오늘에 전하는 감동에 젖어 있다보니, 수천 광년 떨어진 별의 환한 반짝임을 보는 것만 같았다.

                                                                         1999 SBS Power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