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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뿌리 (조세희 제3작집)를 읽고]

kalos250 2002. 10. 22. 02:11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카메라라곤 자동카메라 한 번 손에 쥐어보지 못하고 관심도 없던 대학 1학년 때였다.
몸도 마음도 가난했고 끝모를 갈증에 목말라했던 그 봄에, 문득 혼자 있고 싶어 어두컴컴한 도서관 서고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발견한 책... 흰 색 표지에 작은 프레임으로 담긴 흑백사진 속에는 서늘한 눈매를 가진 소녀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애잔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마치 슬픈 선언처럼.
그리고 조세희라는 이름... 고등학교 시절에 멋모르고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강한 충격이 되살아났다.

책머리에 적힌 작가의 말.
「지난 70년대에 나는 어떤 이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책 한 권을 써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 책이다. 그때 나는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80년대에 들어와 바로 10년 전 그 생각에 사로잡혀 또 한 권의 책을 묶어낸다.
이번 책에는 사진이 들어있다. '슬프고도 겁에 질린 시대에 적합한' 것이 사진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만, 인화를 끝내 공장으로 넘긴 다음에 접한 이 말에 나의 서툰 작업을 연결지어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 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이 책은 작가의 글 몇 편과 사진들로 구성되어있다. 사진에는 1985년 강원도 정선읍 사북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외에 서울과 보길도, 부산, 가평군과 인도, 유럽도 들어 있으며, 뒷부분에는 사진에 대한 짧은 설명과 함께 사북의 현장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글들이 있다.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땐 나도 새로 산 두툼한 법전을 아직(!) 들고 있을 때였으므로, 법전을 '참 근사하다 감탄하며 시간이 있을 때 무심코 집어든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정말 근사해 그 부분의 말들을 읽을 때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떠올리고, 몇 해 전부터 보기 힘들어진 민들레꽃씨의 예쁜 비행 모습을 갑자기 대하게 되는 착각에 빠진다. 이른바 자유권적 기본권과 사회적 기본권의 보장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인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닌다."는 문장은 큰 감동을 주는 부분 가운데에서도 압권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장이 주는 감동은 적어도 이 땅에서는 삶의 비극성을 역설하는 슬픈 감동이다.

화창한 봄날, 어두운 서고 속에 쳐박혀 (필시 수업을 제끼고) 본 흑백의 사진들은 강렬하고 서늘했다.
「어느날 사진 162(사진의 일련번호임)의 젊은이가 와 사진 161을 보았다. 젊은이는 입술 꼭 문 채 사진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사진을 보는 순간 몇 해 전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는 대목에선, 나도 목이 메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어두워진 도서관을 나오고 나서도 〈침묵의 뿌리〉가 주는 감동은 한참 동안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 감동을 언뜻 언뜻 기억 속에서만, 혹은 서점의 서가 속에서 설레며 꺼내보곤 하다. 사진과 아주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던 얼마 전에야 책을 손에 넣었다. 첫 책의 인세로 장만한 사진기로 찍었다는 흑백의 사진들을 보는 일은, 그가 "희망을 서둘러 포기해야 할 이유는 없다"며 아직도 건재하게 보여주는, 날카로운 현실인식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드러나는 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경이로운 체험이다.
조세희 아저씨, 요즈음엔 사진은 안 찍으시나, 찍으신다면 어떤 사진을 찍으실까 문득 궁금해진다.

1999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