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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의 지하철 일기] 1999. 9

kalos250 2002. 10. 14. 15:35



그리움으로 만나는 인사동거리

혭궤열차라는 것이 있었다. 참 해봐야되는 것도 많은 나이에, 당시 수인선이라고 불리던(수원에서 인천까지 운행) 협궤열차를 탔다. 사람들이 꽤 많았다. 뭐가 들어있는지-필시 참기름이나 김, 곡류 뭐 그런 거였을 것이다-꽁꽁 묶여진 보따리들이 여기저기 어엿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힘든 노동을 끝내고 고단한 얼굴로 돌아가는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학생들이 있었다... 어두운 형광등 불빛이 더 정겹게 느껴져서, 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훈훈한 겨울 같았다. 눈이 오는 날 오면 정말 좋겠다고 친구가 속삭였다.
몇 년 후, 시장의 논리에 밀려서 효용가치를 상실한 협궤열차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아련해지면서 아 한숨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서는데 가슴에 그렇게 춥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던 건 겨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팍팍한 시장성의 잣대로 폐기처분되어 사라져가는 것들을 오래오래 배웅하며,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가 상처임을 생각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나오면 인사동거리의 초입이다. 조선시대 인사동은 고관대작의 주택가 일번지였던 삼청동, 가회동과 육의전거리를 연결하는 길이었다 한다. 20세기 권문세가들이 쇠락의 길을 걷자, 당장 먹고 살 것이 없어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도자기 그림들을 들고 나왔고 대저택들은 팔리고 나뉘고 개량되었단다. 그리하여 미술품 상가가 형성되었고 뒷거리의 한옥들은 식당으로 바뀌고 요정으로 바뀌었다 했다. 이렇듯 한국적인 역사의 폭풍 속에서 인사동 거리도 빠르게 변해왔다.
그러나 인사동거리가 다른 도시의 거리와 다른 점은, 오늘날에도 오래된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무조건 부정되는 가속도의 시간을 달려온 우리에게, 배웅할 여유도 없이 사라져간, 아쉬움을 상처처럼 남기고 떠나간 협궤열차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인사동에는 그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 위에 내려앉은 현재 시간들의 켜를 입고서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쇠락한 권문세가의 사랑방에서 끌려나와 옛 영화의 비애를 품은 화방류나 도자기, 그림들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향수를 일으키는 온갖 소품들. 그리고 생활도자기, 생활한복까지. 그것들을 보고 있자면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을 찾은 것 마냥 마음이 따스해진다.

인사동거리 입구에는 크라운 베이커리가 있다. 가끔 인사동에 나왔다가 시간의 틈이 생기면, 이곳 2층에 올라오곤 한다. 고백하자면 내게는 가끔씩 뜬금 없이 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언젠가 그가 이 장소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때부터 이 장소를 애용하게 되었다. 직업상 인사동을 주활동무대로 하는 그이지만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일은 없다. 그래도 그 날 기분에 맞는 빵을 골라 커피 한 잔과 함께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서 거리를 내려다보면 기분이 참 좋아진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인사동에는 수많은 갤러리들이 있다. 대개가 무료인 이 전시회들을 잘 찾아보면 나같이 별다른 예술적 심미안이 없는 사람도 즐겁고 시원하게 공짜로(!) 즐길 수 있으니, 여름철 피서로도, 고단한 일상적 공간에서 벗어나 건조해진 감성을 윤기 있게 만들어보는데도 좋다.
덕원 미술관에서 마침 열리고 있던 <하늘땅 815>라는 제목의 전시를 보았다. 마치 한 판의 굿처럼 어지러이 널려있는 사진들... 좀 특이한 사진작가 최광호씨는 몇 해전 시인이었던 동생 최순호씨를 청평호에서 잃은 후, 매년 동생의 기일을 기해, 여러 친구들과 작업실에서 청평호까지 또는 시인의 모교까지 걸으면서 사진찍기를 하고, 한바탕 시끄러운(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의 축제를 연상시키는) 전시회를 해왔다. 고단한 개인의 삶 속에서, 혹은 광복의 날에 되새겨보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떠나간 이들이 남기고 간 상처와 절절한 그리움의 몸짓으로 만나고자 하는  것이다.
잠깐 넘겨본 도록에서는 8월0을 "그리운 8월"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진평론가 최건수씨 또한 8월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내게도 8월은 그리운 달이다. 어느 해 8월에 있었던 내게 아주 특별한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인사동 곳곳에서는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옥을 개조한 정갈한 분위기의 한정식집들, 새가 이리저리 푸드득 날아 다니는 <옛찻집>, 초등학교 교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학교종이 땡땡땡>, 유년시절을 동화처럼 재현해놓은 <아빠가 어렸을 적에> 같은 재미있는 까페들에서, 혹은 거리의 벤치에 앉아 있거나 거리에 서서 설레임으로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 만남을 향기롭게 만드는 독특한 향기와 빛깔을 가지고 있는 인사동 거리는 그들에게 온통 황금빛 밀밭일지도 모르겠다.
안국 지하철역앞 인사동 거리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만나 그리움으로 깊어진 눈빛이 되고, 그런 눈빛으로 만나 서로를 응시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인사동 거리가 가진 독특한 빛깔의 풍경이 된다.

(SBS Power English 199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