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시인은, 과거란 새들처럼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건드리면 언제든지 그 근육을 긴장시키는 생물"인 새들처럼.
건드리기만 하면 과거의 앙금은 언제나 그 가라앉은 상태로부터 피어오른다. 건드리면 금방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뜨고 있는 과거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과거의 앙금은 '피어' 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꽃처럼 피어나는 과거. 왜 과거가 꽃처럼 피어나는가. 내가 지금 살아있기 때문이다.
-- 정현종, 날아라 버스야 중에서
종로3가 지하철 통로를 지나다 문득 내 가방이 앞으로 향해져 있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자 며칠 전 지갑을 잃고서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을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니가 맨 가방이 늘 뒤로 돌아가 있어서..." 그래서 아무래도 사람 많던 교보문고에서 꺼내간 거 같다는 말이었다
난 대체로 가방을 사선으로 맨다. 가방이 늘 무거운 데다가 어깨가 쳐져 있는지 자꾸만 밑으로 흘러내리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트라이포드를 가지고 촬영을 나갈 땐 엑스X자로 메고 다니곤 해서 십자군병사 같다는 말도 들었었다.) 그 가방이 늘 뒤로 돌아가 있던 걸 눈여겨 보았던 모양이다. . 그 친구한테 선물 받은 지 며칠 안된 지갑이라 속상하고 미안하고 그러던 참이었는데, 너무나 담담한 그 대답이 내심 참 고마워지면서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늘 보니, 나도 모르게 가방이 앞으로 돌아가 있는 거였다.
그런데 불현듯이 어릴 때 기억 하나가 끼어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던 듯 한데, 좀 멀리 있던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오던 길이었다. 자그만 기차역을 지나 호젓한 길을 마구 뛰어오다가, 그만 앞으로 콕 넘어져 무릎팍이 깨지고 코에 커다란 생채기가 났던 거였다.
그 때 엄마가 했던 얘기. "가방을 맨날 앞으로 매고 다녀서...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키가 작고 가방이 컸던 내가 혹여나 앞으로 맨 가방에 걸려서 넘어질까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습관에 대해 눈여겨봐주고 염려해주던 마음이 내 기억 속에 무척 따스했던 기억으로 남았나보았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내 가방이 자꾸만 뒤로 향하게 된 것은 혹 아니었을까.
까맣게 잊었던 어릴 때의 기억의 파편이 이렇듯 불현듯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건 참 새삼스러운 느낌이었다. 참 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 있는데, 시인의 말대로 이 이완되지 않는, 질기고 싱싱한 시간의 근육이란... 정말 눈물이 날 거 같은...
그나저나 다시 넘어지지 않으려고 가방을 뒤로 하던 나, 이제 또 지갑을 잃어버린 나는 가방을 어떻게 매어야 하는 걸까.
울 언니는 오늘 피아노를 샀다고 했다. 14년된 중고피아노. 그런데 그 피아노가 아무래도 오래 전에 아버지가 사주셨던, 그리고 아쉽게 처분해야했던 그 피아노인거 갔다는 거였다. 모양이나 색깔이나 의자에 붙여져있는 야광별까지..
그 피아노가 자꾸 생각나서 다시 살 수 있을까 당시 피아노를 팔았던 집까지 수소문해서 알아보았던 언니.
그 피아노로 , 조카는 어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