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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영주로 가는 그 길] 1997. 04. 28

kalos250 2002. 10. 12. 04:01
대학에 다니던 20대 초반에 단짝 친구가 음악을 몇 곡 복사한 카세트테이프를 선물로 주었었다. '선언과 비단길'이라는 이질혼성의 제목과 함께, "우리 가는 길이 비단길이 아니어도 사랑하자."라는 글을 적어서.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참 많은 일들이 우리를 아프게 통과하거나 그냥 흘러가 버리거나 하면서 우리는 참 짧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내 밀려서라도 가야한다면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강연호 "비단길1")

파주로 향하는 길은 내겐 낯선 길이 아니다. 심지어 일주일 전에도 비슷한 시각에 이 길을 지났었다. 지난겨울 세상을 떠나신 분을 찾아 뵙는 길이었다. 예전의 나는 土葬이란 남아있는 사람이 스스로 위로 받기 위한 형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좀 달리 생각한다. 사람이란  단지 물리적인 생존만을 삶의 조건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면, 최소한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흔적 없이 휘발해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남겨질 수 있는 거라고만 해두더라도, 남겨진 사람들에겐 위로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그리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만들어진 많은 묘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워야 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명당자리를 찾는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이 왜 거기 있어야 했는지 헤아려 볼 수는 있는 일이다. 지난주, 양지바른 언덕 위의 묘가 따뜻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걸 보며, 그게 편안한 안식일거라고 믿고 싶어하던 내 마음이 훨씬 가벼워져 있었음을 생각한다.

첫 번째 답사지는 파주군 봉일천리 뒤 숲속에 위치한 공순영릉이었다. 장순왕후(예종의 비)의 공릉과 공혜왕후(성종의 비)의 순릉,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진종)와 그 비의 능인 영릉이 있는 곳이다.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조선전기 최대의 절대권력을 누렸던 한명회가,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과정으로 왕후의 대열에 올렸던 그의 두 딸들이다. 이들은 둘다 20세 이전에 요절을 함으로써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 말해지는 한명회의 삶에 그 드라마틱성을 더해준다.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1등 공신으로 추대,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아 엄청난 부를 누렸다는 한명회. 그가 말년에 이 속세의 권력과 떨어져 호젓하게 인생을 즐기려고 정자를 짓고 거처한 곳이 지금의 압구정(그의 호이다)인데, 그의 권력을 좇기 위해 뇌물을 잔뜩 지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오늘날 압구정동이라는 공간이 우리 사회에서 점하는 문화적 위상을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의 두 딸들이 누렸을 부귀와 영화, 그것들을 모두 남겨두고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일은 어떠했을 지를 헤아려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했다. 오래 전 TV에서 보았던 영화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가 문득 떠올랐다. 바로 그 스무살이었다! 그 나이-여느 사람의-를 살아보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상실이었으리라. 부귀나 영화 같은 것이 아니라.
용미리 석불은 모자 쓴 부처님이라고 길눈이를 맡으신 분이 설명해주신다. 고려선종이 왕후에게 후사가 없어 원신궁주 인주이씨를 맞아들였으나 역시 후사가 없어 초조하던 차에, 원신공주의 꿈에 나타난 두 도승이 나타나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 이곳을 찾아갔더니 장엄무비한 암석이 쌍립해 있어 여기에 두 도승의 모습을 새로 절을 지어 아들을 빈  후 소원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득남의 영험을 바라는 기도가 끊이지 않는단다. 다른 불상에 비해 가치는 떨어진다는 그 비슷한 설명이 게시판에 적혀있었지만 그 커다란 모습은 배고파 투정하다 지친 아이처럼 소박하고 천연스러웠다.
보광사에서는 서울부근 왕실 원찰의 공통구조라는 D자 평면의 만세루, 세상을 지킨다는 뜻의 호세전, 영조대왕이 심었다는 향나무를 앞에 둔 어실각(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곳), 석가모니의 제자인 16나한상을 모신 응진전, 범종각 등을 찾아보았다. 황지우 시인의 시 "게 눈 속의 연꽃"에 대한 글을 자료집에 쓰셨던 대표시삽 춘헌님을 찾아 설명을 듣고 그 분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황지우 시인도 찾지 못했던 '게 눈 속의 연꽃'을 찾는 그 분의 '눈 맑음'에 감탄하면서.
자운서원은 1615년 율곡의 애제자인 김장생이 조선최대 석학이며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의 넋을 기려 설립하였다는 서원이다. 1871년 한 사람에 한 서원이라는 원칙하에 황해도 배천의 문회 서원에 밀려 헐려버리고 1970년 다시 지은 것이었는데, 선현에 대한 제향을 함께 담당하던 사설교육장이었던 서원의 배치나 면모를 찾아볼 길 없는 재건이어서 우리는 단지 가족 나들이에 적합한 공원인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 곳에는 율곡의 가족 무덤 13기가 함께 있었는데, 마침 옆에서 무덤의 구성에 관한 안내문을 잠시 읽고 있던 '좋은 의사가 되고픈 사람'인 한 회원은 그로부터 당시 조선 사회가 그렇게 남성 특히 장자중심의 사회이지만은 않았음을 읽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회암사지는 경기도 양주산 회천면 회암리 천보산에 있었다.  가는 길에 발견했던 하얗게 눈부신 싸리꽃들은 "무리 지어서 아름다운"꽃의 향기를 맘껏 품어내고 있어서 피로가 느껴지기 시작한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의 후배들은 "문학과 친한" 감수성으로 '달빛 아래서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싸리꽃을 보는 일이 어떤 건지'를 말해주었다.
  회암사는 조선초기까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승려 3천명에 이르렀다가 유신들에 의한 억불정책으로 불 태워지고 폐허로 남은 절이다. 대표시삽님의 놀라운 노고로 멋있게 그려진 자료집의 도면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면서 당시의 당당하던 모습을 그려보고 부도탑과 석 등을 돌아볼 때는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할 때여서 폐사지와 흔적으로 남은 모든 것들에 다소 낮은, 측광이 더해진 조명을 드리웠다. 아쉬움이 느껴지는 빛깔이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인 것이다.

  짧지 않았던 하루동안 둘러보았던 답사지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본다. 처음 보았던 공순원릉이 먼저 떠올라준다. 지난주 보았던 묘가 맘에 생생히 남아있기 때문일 게다. 고단했던, 참으로 고단했던 삶이 마지막 안식을 찾은 곳. 그분의 삶은 대체로 '비단길'은 아니었다. 말년엔 더욱 상해버린 그 분을 보는 일조차 내게는 고통이었다. 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은 평온했지만, 어쩌면 그 평온함의 일부에는 남은 이들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었으리라고 남은 우리는 생각했었다. 화려한 생을 마감하고 요절한 장순왕후와 공혜왕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들의 삶은 '비단길'이었을까? 삶은 본질적으로 '비단길'일 수 있을까? 황지우시인의 싯구절 처럼 도취하지 않고서는 이 생을 견딜 수 없기에 ("물 빠진 연못"中) 우리는 우리 삶을 '비단길'이라고 해야할까? 현실을,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은 왜곡된 환상이고 절망해야 하는 눈을 가로막아 거짓으로 세상을 보게 한다는 것, 비상의 시작으로서의 절망만이 희망의 시작일 수있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가 있었고, '비상의 시작으로서의 절망'이란 글로 사유하는 사람들의 언어라는 한 친구의 회의가 있었다. 인생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 과연 희망을 위해 고통과 아픔을 수반하는 절망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사고에서 다소 물러나 있는 나는 단지 심정적으로 그 친구의 말에 공감을 한다. 그리고 나의 사고는 여기서 잠시 숨을 멈춘다.

       비단길 1
                               강 연 호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헛디뎌봐 헛디뎌봐 유혹하는

  허방이여, 온다던 사람 끝내 오지 않아서

  기어이 찾아나선 마음 성급하다 발 거는 걸까

  잠시 허리 굽혀 신발끈이나 고쳐 매면

  흐린 물둠벙에 고인 행색

  더는 고쳐 맬 수 없는 생애가 엎드려 있다

  앞서거나 뒤쳐지는 게 운명이라서

  대상의 행렬은 뽀얀 먼지 속에서도 유유한데

  비단길, 미끄러운 이름답게 나를 넘어뜨릴 때

  어디 經을 외며 지나는 수도승이라도 있어

  저런 조심해야지, 일으켜주며 세상의 홍진

  온전히 털어내는 법 가르쳐줄까

  물음표처럼 휘어진 등뼈 곧추세울수록

  먹장구름은 다시 우르르 몰려와 기우뚱거린다

  지나가는 저 빗발 긋는 동안이라도

  내 멈춰서지 못하는 건 영영 모래기둥으로 변할

  몇천 년의 전설 두렵기 때문이 아니다

  밀려서라도 가야 할 인연의 사슬

  질기니 이름만이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얽힌 마음  牡蓚 걷다 보면

  길 잘못 들었다며 앞을 가로막는 이정표조차

  그렇게 정답고 눈물나는 것을

  1997. 04. 28   하이텔 고적답사 동호회 답사기

*아, 이렇게 답사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희경이에게 이끌려서 관동지역 답사를 나간 뒤로 이래저래 꽤 많은 곳을 다녔던 거 같다.  
진이에게서 받은 테이프는 플레이어도 없는 지금도 서랍 한 구석에 자리를 차리하고 있고...
그즈음 우연히 맞닥뜨린 "비단길"이라는 시를 읊어보며, 앞을 가로막는 이정표를 본 듯이 그만 눈물이 나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