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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와, 변비 처방

kalos250 2006. 3. 9. 03:07
여기는 일산.
커다란 창문앞에 앉으면 온통 하늘이고, 일어서면 호수공원이 내다뵈는 오피스텔이 너무 맘에 들어, 이래저래 마냥 지연되던 저기 먼 낯선 곳으로의 여행에 대한 동경마저 깜빡 깜빡 잊어먹고 있는 중입니다.
살고 있는 곳이 바뀌면서 한결 부드러워지고 넉넉해지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居가 氣를 결정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번 이사를 가장 반기는 것은 아주 가까이 살게 된 여섯살 조카 녀석입니다.
맨날맨날 놀러오려 떼쓰는 이 녀석에게 울 언니는 오늘 거짓말까지 해야했습니다.
이모는 일하러 맨날 맨날 나가야한다고.

오늘 낮엔 대학동창으로부터 오랫만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어제 이사왔어, 라는 내 말에 친구는 "사는 형편이 나아져서 간 거야?"
라고 물었는데, 가끔씩 전화해서 나의 건강과 안녕을 묻는 이 친구의, 너무나 상식적이고 일상적일 이 말이 어찌나 생소하던지요.
세 아이를 키우면서 갓난아기까지 데리고 온 식구가 뉴욕에 뮤지컬을 보러 갔다오기도 하던, 경제력 빵빵한 남편을 둔 강남 부촌에 사는 친구의 말이어서 더욱 생소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사는 형편.. 별로 나아진 것은 아니어서 더 열심히 살게 될거 같다고 답해주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간절하게 그러합니다.

졸음이 다가올 때 얼른 자기, 배가 고파올 때 얼른 먹기.. 새로운 곳에서 居하면서 정한 단기전략입니다.
오래 전에 병원에 갔다가 변비증상을 얘기했을 때, 의사의 처방이 생각났습니다.
"변의를 조금이라도 느끼게 되면,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세요. 그 일이 세상에서, 사는 일 중에서 가장 최고로 중요하다는 듯이."
그 때는 재미있는 말이군, 하면서 흘려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마냥 심오합니다.
살아가는 많은 일에 그 말이 적당해보입니다.
때를 놓쳐 아예 못하게 되거나, 기능저하가 되어 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새벽녁이 되어야 잠이 드는 것, 여섯살 조카녀석에도 못따라가는 소화기능을 가지게 된 것. 모두 그런 일이지요.

연애나 결혼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강력히 권유합니다.
'변의처럼, 외로움이 느껴져올 때 얼른 저질러 버려. 그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 줄 알지?)

창밖의 멀리 가물거리는 불빛들이 너무나 이쁩니다.
낼은 카메라 렌즈의 먼지들을 좀 털어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