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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와, 대한민국에서 독신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짧은 생각

kalos250 2006. 3. 11. 22:45
이사기념으로 언니가 매트리스를 선물로 사주었다.
나는 그리 무겁지 않아서, 또 혼자 자기 때문에 좋은 게 없어도 된다 하였지만, 언니는 기어어 비행기에서 남자가 옆으로 떨어져도 모르고 잘 정도로 편안하다는 값비싼 브랜드를 골라주었다.
그리고나서 그에 맞는 침구류를 함께 골랐다.
계속 꽃무늬를 골라주는 언니에게 강력하게 노우를 표시하면서, "왜 점점 꽃무늬가 좋아지나 몰라, 주위가 온통 다 꽃무늬가 된다니까"라는, 일산 사는 두 딸아이를 가진 친구의 말이 떠오르면서 '엄마가 된다는 건 꽃무늬를 좋아하게 되는 것' 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타인의 취향"이었나, 꽃무늬에 집착하는 주부가 나왔던 영화가?
꽃무늬란 참 재미있는 메타포일 수 있다는 생각이 언뜻 스친다.
능력이 된다면 왜 꽃무늬일까 라는 것에 대해 연구해봐도 재밌겠다.

집에 돌아와 수년 동안 잠자리를 제공해준 노란 이불을 제껴두고, 꽃무늬는 아니지만 제법 화사한 이불을 펴놓고 큰 맘 먹고 장만한 커피잔 세트 등을 정리하니 기분이 좋다.
친구가 누누히 오랫동안 강조했듯이 일산은 무척이나 살기가 편하지만, 그 편리함의 많은 부분은 소비행위를 전제로 하는 것임이 명백하다.

이번주까지는 이사마무리와 이모의 이사를 고대하던 조카와의 시간으로 하고 담주부터 작업모드로 들어가기로 작정한 터라 한가해진 시간에 몇 년전 혜영이가 보내주었던 김형경의 소설책,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집어들었다. 오래 가지고 있어도 된다고 책주인은 말했지만, 차분히 한 번 더 읽고 돌려줄께, 라고 말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버려 얼릉 읽고 돌려줘야지 하던 참이었다.

펼쳐본 책의 서두엔 우리 사회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문직 독신여성들의 목소리가 낭랑하다.


"제가 결혼하려는 이유는 사회적인 거예요. 독신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더 이상 독신 여성으로 살기가 불편해서죠. 세 걸음에 한 번씩은 독신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편견들에 제도적 불함리함에 발이 걸리죠. 그것이 사실이든 제 과민 반응이든 간에, 제가 사는 데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개선하려고요."

"결혼이란 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이라는 권력으로부터 승인받는다는 뜻이고,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승복한다는 뜻이고,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편입되다는 뜻 아닌가요? 제도에 의해 보장된 남자를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 그의 권력을 나누어 갖고, 그가 성취한 것을 함께 누리며, 그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죠."

"화려한 싱글이라는 단어는 대체 어디서 굴러 떨어진 개 뼈다귀예요? 이 남성 중심의 사회가 독신 여성에게 얼마나 냉혹한데 그 따위 환상을 공공연하게 유포하는 것죠? 겨우 그거, 남성들이 만든 제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산다는 자유 한 가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수해야 되는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듯 독신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사회를 살면서, 비록 이 여성들처럼 주류안에 확고한 입지를 다져놓지도 못하였고 한참 벗어난 주변부를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살아갈 뿐인 나 역시, 특히 최근 들어와서, '대한민국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를 자꾸 확인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어제만 해도 결혼하고 오랫동안 행복해서 더 바랄 게 없다고 함성을 지르던 후배가 처음으로 결혼생활에 엄살을 부리는 것을 듣고 감히-사실 내가 결혼에 대해 뭘 알겠는가- 충고를 해주면서 이 대사를 날렸더랬다.)

"결혼"을 굳이 하지 않았다는 것, 그 부작위가 엄청나게 용감한 선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겨우 "서너걸음에 한 번씩"은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애써 그게 작은 걸림돌이며, 인간은 큰 바위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맹이에 넘어지게 된다'고 그 넘어짐을 위안하곤 하지만 그 걸림돌이 점차 높아져 마침내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앞길을 가로막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점점 커지는 게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성공한 여성들도 그러할 진대 -그제 내 집을 방문했던 성공한 여성인 언니도 잠시 그러한 그늘을 보여주었더랬다 - 나를 포함한 아슬아슬 인생들은 어떻겠는가 말이다.. -,.-

이런 생각을 하다 고작 내가 위안을 찾은 방법은, "뭐 인생 별거겠어." 라는 삼순이의 대사.
우짜든 대한민국에서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지지 못해 나눠줄 수 없는 남성들까지 포함해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최근 들어 더 자주 듣게되는. 종족번식의 숭고한 가치를 망각하고 인생을 향유하려고만 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인류공영의 가치를 저버렸다는 이기적인 독신족에 대한 여론의 질타는 억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