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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살과 내아버지의 로맨스 ♪

kalos250 2005. 8. 19. 03:16

굳은살에도 종류가 있다. 환영받는 것과 환영받지 못하는 것.
기타 연습을 제대로 한다면 언젠가 나의 왼손가락 끝에 출현할 것으로 기대되는 그것은 전자일 것이고
나의 발바닥에서 퇴출되려고 하는 건 후자이다.

나의 발바닥엔 언젠가부터 굳은 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기도 발바닥에 굳은 살이 많다는 한 친구는 나이 먹어서 그런다 하고, 나는 사진 찍는다고 삘삘거리고 돌아다녀서 그렇거나 엄마를 닮아 유전적으로 그런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 반신욕을 하며 발을 보다가 발바닥이 매끈해진 걸 보고 좀 놀랐다.
조금만 부지런해지면 굳은살도 없어지는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얼마 전 화장품 가게에서 스킨을 사려다 하나 더 사면 그린색 시원한 물통을 준다는 말에 혹해서 집어들었던 굳은살 제거기가 그 일을 해냈다. 그걸로 몇 번 살살 밀었더니 굳은살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신기하다.

엄마가 세상을 뜬 것이 벌써 꼭 27년하고 사흘이 지난 지금 나는 엄마의 발을 얼굴만큼이나 생생히 기억한다.
갈라지고 굳어진 발. 하얀 얼굴이나 조용한 모습과 다른 표정을 지닌 발을 보며 뭣도 모르던 어린 나는 마음이 쏴 했었다. 살아계신다면 난 좋아라 하며 엄마 발에 '굳은 살 제거기'를 들이댔을 것이다.

다 가난했던 시절. 그래도 상대적으로 살만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엄마는 같은 동네 살던 아빠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단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의 장손이었던 아빠의 어머니, 무섭도록 완고했던 나의 할머니는 몸이 약해보인다는 이유로 엄청난 반대를 하셨다 했다.  
그러나 아빠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였고 집도 땅도 동생내외에게 내어주고 몸만 나와 서울에 정착을 한다.

어린 시절 기억의 몇 컷엔 아빠와 엄마 손을 잡고 의정부에 갔을 때의 너무나 냉담했던 할머니의 모습이 있다. 가뜩이나 반대하는 결혼을 했던 차에 딸만 내리 셋을 낳은 맏며느리를 영 마뜩찮아 했던 할머니. 그러다 넷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많은 식구에 장남으로서의 경제적 부양의무도 감당하느라 너무나 빠듯한 살림에 넷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기력을 다 소모했을 엄마는 병을 얻게 되었고 이년의 투병 끝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 고단하고 짧은 생속에서 엄마는 행복했을까, 라는 생각을 새삼 해본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아마도 행복했을 것이라는 쪽에 마음이 기운다. 매일 병상옆을 떠나지 않던 아버지곁에서 엄마의 표정은 슬퍼 보인 적이 없었고 힘든 투병중에도 늘 평화로워 보였으니... 적어도 내 기억속에선 그렇다.

엄마의 묘는 처음에 가족묘가 아닌 조금 떨어진 외진 비탈에 만들어졌었다. 할머니의 뜻이었다고 들은 것도 같다.
약간 그늘지고 습했던 그곳엔 이상스레 풀이 너무 많이 자라 벌초를 하러 갈 땐 길을 만들며 올라가야했다.
그곳에 묘를 만들고 난 후 그 앞에 앉아 한참이나 흐느끼던 아빠의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아빠의 엄마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고, 감동적이다 말했었다. 일찍 죽었어도 엄마가 행복한 사람이란 말도 들었다.  
마지막까지 엄마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않았던 할머니는 그 후로 몇 년을 더 사셨는데, 막 결혼한 막내삼촌 부부와 우리가 인사를 가면 새 작은 엄마에게 우리 엄마 칭찬을 오래 하곤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도 하였다. 그 과묵하셨던 분이!

힘 좀 쓰던 덩치 큰 남동생이 미국으로 가버림에 따라 벌초를 할 수 있는 노동력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다. 업체한테 맡기는 건 왠지 맘에 안놓여 그냥 나섰던 우리는 형부가 난색을 표하자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막판에 운좋게 우리를 알아보는 묘 근처에 사시는 분과 얘기가 되어 벌초를 맡기는 걸로 결론이 지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는 "그동안 호미질 낫질 하느라수고했다"는 말을 내게 건넸다. 나는 이럴 때만 결혼을 안한 것이 몹시 미안해져 두 몫을 한다고 너무나 열심히 호미질 낫질을 했었는데, 어린 조카들을 보느라 일을 손에 못댔던 언니는 그게 몹시도 맘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언니는 이 결론을 무척 만족스러워했고, 고생하는 형부에게도 미안하고 자주 가보지 못해 맘이 편치 않았던 나 역시 그러하였다. (언니는 이 일이 걱정이 되어 기도를 간절히 했다 한다. 하나님 이거 해결 안해주시면 교회 어린이 수련회 가서 밥하는 거 안합니다, 라고. 대단한 신앙이다. 난 이럴 때 언니가 참 귀엽다.)

그리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엄마와 아버지를 화장을 해서 두 분의 추억의 장소였던 여수 오동도에 뿌려드리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다 조카들에게 '혹 이모가 급작스럽게 죽게 되면 제주도에 뿌려달라'고 주문을 하고 약속을 받아냈다.
사실 꼭 제주도여할 필요는 없으나 지리산, 이러면 조카들에게 너무 힘든 일을 시키는 게 될 터이고 그 차에 제주도의 좋은 경치를 보고 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다. 의료보험에서 장례비가 좀 나오니 비행기값에 좀 보태고...  진지하게 듣던 조카 지윤이는 걱정말라며 씩씩하게 약속을 해주고 손바닥 도장까지 찍어준다.

얼마 전 "재난" 이라는 다큐를 보았는데,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가 아이의 기일마다 아이의 사진을 붙이고 아이의 이야기를 적은 엽서를 지인들 모두에게 보내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부모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건 아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 기억하게 하는 것.
나도 사춘기 한 때엔 엄마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두려워져 아무도 몰래 벽지에 아주 작은 글씨로 엄마의 이름을 써넣곤 했었는데, 지금도 엄마의 기일이 되면 자꾸 자꾸 기억이 살아나고 엄마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다.

고단했던 엄마의 짧은 인생이 쉽게 잊혀진다는 건 너무나 억울한 일인 것만 같아 꼭 그래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 ... 굳은살로 시작된 이야기가 하염없이 길어졌다.

나의 아버지는 냉정하게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그다지 좋은 아버지는 못되었다. 게다가 엄마를 그리 힘들게 하였으니 그 때문에 밉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엄마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사랑하고 지켜주었다는 것, 마지막까지 엄마를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에 큰 점수를 주고 싶어진다.
그후로도 굴곡이 많았던 인생이었으나, 그 속에서도 평생 오로지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던 아버지의 로맨스가, 오늘은 좀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매미 소리가 시끄러워 오늘밤에도 잠이 안오겠다 . 내일도 몹시 더울려나 보다.  

♪ : 영화, 봄날은 간다 중 "행복했던 날들"